소진된 인간

본선 단편경쟁

김진수 | 2021 | Experimental, Animation | Color | DCP | 6min 34sec (E)

SYNOPSIS

군인 형상을 한 네 개의 인형이 사뮈엘 베케트의 <쿼드>(Quad, 1981)에서 따온 움직임으로 네모난 공간을 걷는다. 질 들뢰즈의 <쿼드>에 관한 분석 『소진된 인간』(1995)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한 이 영화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통해 ‘가능성의 소진’을 탐구한다. 인형들, 그리고 인쇄된 인형들의 이미지는 천천히 붕괴되고 반복의 잔여물로서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한다.

DIRECTING INTENTION

애니메이터는 반복된 행위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애니메이션의 한 프레임을 만든다. 통제되어 조금씩 움직임을 가지는 영화 속 인형은 마치 개인의 의지와 욕망이 통제된 군인들과 비슷하다. 반복된 행위로 인해 인형은 조금씩 붕괴되고 그 점을 통해 반복, 소진 그리고 자유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FESTIVAL & AWARDS

2022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단편경쟁
2022 제20회 판토체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DIRECTOR
김진수

김진수

2018 내장토끼
2020 뛰는 순간들
2021 심리테스트

STAFF

연출 김진수
촬영 김진수
조명 김진수
출연 최희현

PROGRAM NOTE

이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은 사각형 무대에 군인 인형 넷이 정렬하고 걷는 것으로 시작한다. 사각형의 꼭지점에 선 이들은 동시에 오른쪽 꼭지점을 향해 한 변을 걷고, 이어 대각선 꼭지점을 향해 걷는다. 이 두 움직임이 반복된다. 각자의 대각선 꼭지점을 향해 걸을 때 중심점을 비껴 나가 부딪치지 않고 각자의 목표에 도착한다. 군화 소리가 정연하게 들리는 가운데 1955년 발표된 장용학의 전후문학 「요한시집」의 서문에 해당하는 ‘토끼 우화’가 요약되어 들려온다. 굴속에서 평생을 살던 토끼는 바깥이 보고 싶어 나갔다가 처음으로 만난 빛에 실명한다. 토끼는 자유의 대가로 눈을 잃는다. 군인들은 하나씩 무대 위에서 사라진다. 사각형 밖으로 내던져지고 넘어지고 다리를 잃고 몸이 파열된다. 이 애니메이션의 제목은 ‘소진된 인간’이다. 시작 후 5분쯤에 이르면 제목과 내용은 명확한 의미화를 구성한다. 그 잔여 없음은 이 작품이 대본으로 일부 빌려 왔지만 이 작품과 달리 의미화에 포섭되지 않는 사뮈엘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쿼드>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소진된 인간’은 들뢰즈가 베케트의 텔레비전 단편극 모음에 붙인 해제를 번역한 책의 제목을 가리키므로 이 영화는 정확한 출처를 드러내고 있지만 전략은 다르다. 이 작품에 잉여가 있다면 인형들을 매 프레임 움직이게 만드는 애니메이터의 침입과 촬영되는 현장의 바깥이 포함된 장면이다. 그리고 후반부. 네 인형의 동작들이 궤적을 남기며 뭉쳐지는 순간, 프랜시스 베이컨의 다면화가 뭉쳐진 것 같은, 네 인물의 한 무더기만이 화면에 남는다. 네 군인 인형의 과열된 피로가 이미지의 소진에 이른 것이다. 이것은 베케트가 대본에서 언급했던 중심점의 탈선이다. 문학과 텔레비전 극본, 작품 해제 등 서로 다른 콘텍스트들을 규합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화면 밖의 보이지 않는 손까지 전면에 끌어들여 의미화 너머에 도달하고자 한 주목할 만한 엔딩이다.

김미영 / 서울독립영화제2022 예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