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영화 하기’의 어려움을 토로합니다. 우리 모두 언제 끝날지 모를 긴 가뭄을 버티는 중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엄살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작년, 재작년, 아니, 시간을 거슬러 과거의 심사평들을 읽어봐도 비옥한 토양 위에서 ‘영화 하기’의 수월함을 논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언제나 난관과의 싸움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 안에서의 유희입니다. 누군가는 어디선가 어떻게든 만들고 있습니다. 2026년 서울독립영화제에 출품된 장편 영화 202편을 보면서 심사위원들은 다시금 그렇게 느끼며 경쟁작으로 12편을 선정했습니다. 특히 올해는 기존의 영화 문법을 생경한 방식으로 해체하고 ‘카메라’의 힘을 무너뜨려 다르게 사용하는 청년 감독들의 영화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른 감각과 시선으로 찍은 세대의 파편화된 초상, 관계와 일상, 사회의 풍경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언젠가 이처럼 낯설고 흥미로운 흐름에 대해 말할 기회가 오길 바랍니다. 여느 해보다 뛰어난 다큐멘터리가 많았다는 사실과 이번 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작품들을 여럿 발견했다는 점을 기쁘게 전합니다.
먼저 다큐멘터리 4편을 소개합니다. 문정현의 <비대면의 시간>은 그의 전작들이 걸어온 궤적과 감독의 개인사, 그리고 극적으로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풍경 모두를 아우르면서도 그 사이에서 분열하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혐오가 일상이 된 한국 사회의 현장을 끈질기게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 뿌리를 쉽게 가려낼 수 없다는 난감함을 마주하며, 관객 또한 그 자리에 서게 합니다. 장윤미, 이수유의 <하나하나의 세계>는 근래 등장한 동물권 영화 중 가장 명징한 시청각적 화법으로 우회로를 두지 않고 반문하는 영화입니다. 합리적인 가격의 단백질 공급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가 용인해 온 동물 학대의 현장과 맥락을 추적하며, 동물들의 고통에 모두가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자각하게 합니다. 윤주영의 <소리그물>은 재개발로 사라져가는 터전에 대한 기록이 어느새 어린 시절 폭력의 기억으로 되돌아가는 자전적 여정의 영화입니다. 여전히 감독을 짓누르는 고통을 견디며 현재를 살아내기 위해 영화가 선택한 방식이 무섭도록 정교하고 과감합니다. 이승준의 <지금 얘기해도 돼요?>는 소위 ‘비행 청소년’이라는 용어로 쉽게 규정 되어온 존재들의 삶의 조건, 내적 갈등을 사려 깊게 들여다보는 영화입니다. 감독은 쉼터의 선생님들처럼 청년들이 머물고 오가는 거처와 법원과 길의 동반자가 되어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영화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고심합니다. 박홍렬, 황다은의 <백일잔치>는 성미산 마을의 ‘도토리 방과후 교실’에 다니는 어린이들을 기록한 영화입니다. 어린이들의 친구이자 관찰자이자 그들이 마주하는 어른이자 공동체의 일원으로, 무엇보다 이 모든 위치를 수평적으로 오가는 감독으로 어린이들의 생기와 변화를 품습니다. 관객에게는 이 영화 자체가 놀이이자 배움의 터전이 될 것입니다.
극영화 6편의 면모도 다채롭습니다. 우선 올해 영화제에서 처음 선보이는 이름들입니다. 동이향의 <노바디 느와르>는 가상의 세계에서 미지의 존재를 좇으며 종교와 죽음, 구원에 대해 성찰하는 영화입니다. 여러 갈래로 뻗어가는 장면들, 연극적 설정, 과감한 구도와 이미지를 통해 근래 보기 드문 세계의 형상을 구축해 냅니다. 손영모의 <방향감각>은 벤치에 앉은 두 남자의 방향도 저의도 모호한 대화를 하염없이 지켜보는 시선으로 장면의 문을 여는 영화입니다. 한참 뒤 출구로 나온 우리는 이것이 영화 제작에 필요한 최소의 요소만으로 완성된 효과적인 ‘영화교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낯익은 감독들의 신작들도 있습니다. 김정근의 <공고>는 주인공들이 특성화고등학교를 다니던 과거의 실제 장면들과 졸업 후 이들이 직접 자신을 연기하는 현재 장면들을 교차시키며 기이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영화입니다. 생생한 성장영화이자 괴상한 로드무비이자 씁쓸한 사회 드라마이자 흥미진진한 코미디로 불릴 만합니다. 신동민의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닌>은 죽음을 경유해 삶에 이르는 과정을 잔재주 부리지 않고 묵묵히, 세심히 따라가는 영화입니다. 더러 무겁지만, 대체로 평범한 일상 안에서 귀하게 빛나는 순간과 관계를 포착하는 방식이 미덥고 그 방식을 비추는 인물들의 얼굴이 마음 깊이 남습니다. 오세현의 <베일러>는 농촌의 자연과 공동체의 풍경이 그 안에서 하루하루 노동하며 자신의 시간을 살아내는 사람들, 특히 한 여성의 내적 풍경과 만나는 영화입니다. 드넓은 벌판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이 세계의 육체성은 단단하고 성숙한데, 그럼으로써 더없이 고독해집니다. 김미영의 <모종의 탐정>은 글이 잘 써지지 않아 무력감에 빠진 한 작가의 얼굴에서 시작하지만, 이내 끝을 알기 어려운 모험의 길을 따라가 보는 영화입니다. 특별한 설정이나 사건 없이도 그 길이 얼마나 유쾌하고 엉뚱하고 친밀하며, 예상치 못한 순간들로 풍성해질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박송열의 <사랑의 지평선 너머로>는 박송열, 원향라 부부의 세계에 아기가 더해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하던 관객들에게 선물처럼 도착한 영화입니다. 아기가 태어난 후 부부의 지평은 어떻게 변모하고 어떤 유머가 새로 일어나며 어떤 힘겨움이 발생하고 그리하여 영화와 삶은 어떻게 병행될 수 있는지 목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작품 중 단 몇 편만을 택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고심하다 아쉽게 경쟁작에 올리지 못한 영화들도 적지 않습니다. 출품해 주신 감독님들 모두에게 감사와 응원의 말씀을 전합니다. 언젠가 또 다른 작품으로 다시 만날 날이 올 거라고 믿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 2026 본선 장편경쟁 부문 예심위원 (가나다순)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남다은(영화평론가)
남동철(영화평론가)
박동훈(영화감독 <이상한 나라의 수학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