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사는 곳

서울독립영화제2018 (제44회)

선택단편

이상일 | 2018| Fiction | Color | MOV | 39min 13sec

SYNOPSIS

명신은 녹음기를 앞에 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건너편 건물에 자리한 피아노 학원에는 예닐곱 살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 명신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며 선생님으로 만난 정욱을 생각한다. 정욱이 입시 때 선물해준 녹음기를 보며 그와의 만남이 재능이 없음에도 포기하지 못한 피아노와 같다는 생각을 한다.
며칠째 그의 연락을 거절하며 이삿짐을 꾸리는데 늘 가지고 다니던 녹음기 속 단편적인 기록들은 하나의 기억이 되어 다시 명신을 괴롭힌다. 창밖으로 정욱의 자동차가 보이고, 초인종이 울린다. 문을 열지 않으면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가 나오는 소리가 들리고 명신은 놀라서 문 앞으로 뛰어간다.

DIRECTING INTENTION

기억은 저장되어 있기보다 어떤 단서들로 촉발되기 시작한다. 즉발적으로 나타난 기억의 단편들은 무질서의 균형을 이루며 하나의 감정으로 수렴된다. 전혀 별개의 것이라 생각되던 기억들이 모여 의미가 되고 이야기가 되고 아픔이 되고 기쁨이 된다. 그런 점에서 명신이 들고 있는 녹음기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추억이라기보다 영화적 기억의 단서이며 하나의 필름 조각들이라 할 수 있겠다. 공간 위에는 시간의 단서들이 쌓인다. 인물의 얼굴과 대사보다 하나의 공간이 보여주는 시간의 기록은 더 많은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 짧은 단편영화 속에서 그 공간의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힘든 일이겠지만 아마도 거기에 남는 감정들은 추측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본다.

FESTIVAL & AWARDS

World Premiere

DIRECTOR
이상일

이상일

2009 <암초가 있는 곳>

2012 <8>

 

STAFF

연출 이상일
제작 이상일
각본 이상일
촬영 이큰솔
편집 엄윤주, 이상일
현장녹음 이규호, 신해인
미술 이상일
사운드 믹싱 개화만발 스튜디오
2D&3D그래픽 이상일
색보정 이큰솔
출연 박주희, 이종무

PROGRAM NOTE

다른 사람과 결혼한 남자를 잊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여자는 여전히 자신을 찾아오는 그 남자를 외면하지 못한다. 여자는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돼 있는 듯하다. 여자의 방에는 제 짝을 잃어버린 서랍들, 풀지 않은 상자들, 사람의 흔적 없는 침대와 텅 빈 책장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러나 여자는 떠나지 못한다. 때론 거친 바람이 불어오기도 하고, 때로는 순식간에 빛이 어둠으로 변하기도 하는 여자의 방은 마치 여자의 마음속 같다. 이곳에서 하릴없이 남자를 기다리며, 창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는 여자는 낡은 녹음기를 반복 재생하며 떠남을 유예시킨다.
녹음기 속의 목소리는 연인과의 추억을 들려주기도 하고, 이제는 잊고 살아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단순히 과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 스크린 위 인물들의 대화는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립싱크하듯 이루어지는 데, 이렇게 과거는 현재에 덧입혀지며 끝나지 않는 여자의 고민을 보여준다. 왜 그가 여자를 찾아올까라는 질문에 여자의 또 다른 자아는 여자가 어디로 가야 그를 찾을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화는 2D와 3D 그래픽 애니메이션 효과를 이용해 실험적으로 여자의 내면 공간을 표현한다. 특히, 무표정한 여자의 얼굴과 그래픽 배경 위에 놓인 인물들은 마치 <설리에 관한 모든 것>을 보는 듯한 인상을 주며, 인물들이 느끼는 고독과 소외를 효과적 으로 보여준다. 여자는 자신의 마음의 감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배주연 / 영화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