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메들리
서울독립영화제2010 (제36회)
국내초청(장편)
박경근 | 2010|Documentary|Color, B&W|DV(Beta)|79min
SYNOPSIS
녹슨 철의 일그러진 표면과 쇠가 부딪치고, 깎이고, 제련되는 소름 끼치는 소리, 그리고 쇠와 쇠 사이에 흘러내리는 물과 기름은 감독의 불안감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어릴 때부터 꿈에 등장한다. 감독은 악몽의 원인을 찾아 여기저기 쇠를 깎고 있는 서울에 영세한 공장이 밀집해 있는 청계천 뒷골목을 헤맨다. 그 과정에서 감독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고물상을 운영하던 할아버지의 경험이 감독의 아버지와 자신에게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하나의 집단 무의식으로 감지하면서 돌아가신 할아버지께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융(Jung)적인 집단 무의식을 자기가 참여하고 관찰한 청계천의 다양한 철공소, 주물 공장, 금형 공장 등을 통해 영상 이미지로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악몽이 급변의 시기를 겪은 지난 세대의 충격적 경험으로서 대대로 꿈이라는 무의식을 통해 전승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질문을 할아버지에게 던지며 불안전한 톤의 내레이션이 펼쳐지는 매우 “주관적”인 다큐멘터리가 시작된다.
DIRECTING INTENTION
한국의 산업화는 주체적인 기술발전의 과정이 아니라, 식민지를 통해 타의에 의해 겪으면서, 기계미학을 음미할 시간이 없었다. 또한, 산업화, 기계화, 자동화 기술이 우리의 전통과 조상들에게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다. 심지어, 그러한 변화를 지각하는 신체적인 감각조차 마비되었다. 이는 아직 우리가 (한국인) 근대화를 극복하지 못하는 결과이자 원인이기도 하다.
청계천이라는 한국의 산업화를 대변하는 공간에서 만난 ‘쇠’는‘근대적’ 삶의 필수적인 물질이지만,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 살기에, 우리의 ‘무의식’을 나타내기도 한다. 영화에서 무의식의 세계인 꿈과 청계천 금속공방들과의 필연적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자아의 경험이라기보다는, 한국이라는 공동체에서 물려받은 또 다른 정신체계에 기반을 둬, 세대를 통해 내려온 무의식을 나타낸다.
기술자들의 작업풍경이 만들어낸 복잡한 리듬과 장단은 우리의 응어리진 무의식을 살풀이하고, 내 몸을 통해 전해진 억압된 경험은, 의식적인 예술로, 다큐멘터리로 승화되었다.
FESTIVAL & AWARDS
2010 제15회 부산국제영화제
DIRECTOR

박경근
2005 <평화로운 신도시의 초대>
STAFF
연출 박경근
각본 박경근
촬영 박경근
편집 박경근
PROGRAM NOTE
세상의 많은 공간과 기억들이 인간의 왜곡된 욕망과 이익을 좇아 차츰 원래의 형질이 변질되거나 혹은 아예 사라져간다.한때는 많은 이들의 삶의 공간이자 이데아였던 청계천의 작은 공장들도 시멘트 위를 돌고 도는 맑은 아리수를 보고파 하는도시인의 욕망에 묻혀 그들의 존재 가치를 점차 상실해간다. 박경근 감독은 지금은 사라져 버린 청계천의 죽음을 목도하며매우 색다른 방식으로 그 마지막을 기록했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전통적인 극영화들이 충분히 현실적이지 않다고 생각하고,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극영화가 너무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 작가들은 온전하고 정확하게 표현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원했고, 아방가르드 작가들은 내제적이고 주관적인 진실과 미학적으로 형상화된 패턴이 시적으로 표현되길 원했다. 박경근 감독의 <청계천 메들리>는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의 중간쯤에서 주관적인 진실과 형상화된 패턴으로 청계천의 죽음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페르낭 레제(Fernand Leger)의 <기계적 발레 Ballet Mecanique>(1924)와 만 레이(Man Ray)의 포토그램(Photogram) 방식을 연상시키는 추상이미지와, 한국의 근대사를 가로지르는 뉴스 릴 영상, 철을 먹는괴물 <불가사리>의 알레고리 그리고 죽음을 기다리는 청계천의 현재 이미지들은 ‘나’의 존재를 투영하는 할아버지에 대한편지 형식의 내레이션, 공간의 디제시스를 모사하는 금속음의 음악 등 사운드 요소와 놀라운 화음의 몽타주를 이룬다. 다큐멘터리는 ‘남의 실패가 내 성공으로 이어지고, 항상 패배감이 맴도는 곳을 쫓아다니며 죽음을 선포하는 것’이라며 스스로의 행위를 단속하던 감독. 감독이 체험한 재현될 수 없는 악몽의 형상적인 패턴들은 이제는 기억조차 가물거리는 죽어버린청계천의 현재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허욱 / 서울독립영화제2010 집행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