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봉
서울독립영화제2013 (제39회)
특별초청(장편)
박기용 | 2013 | Documentary| Color | DCP | 80min
SYNOPSIS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은 서울 속의 타지이다. 가리봉 거리를 가득 채운 중국어 간판과 함께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중국어와 낯선 조선족 사투리를 듣고 있자면 이곳이 어디인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인근에 있던 구로공단이 한국을 대표하는 수출산업공단으로 이름을 날리던 90년대 초까지 10만 공장 노동자들로 득실거렸던 가리봉은 지금은 조선족 타운이 됐다. 1990년대 말 구로공단이 가산디지털단지로 개명하며 재개발되자 그 많던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과 함께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버렸고 그렇게 생긴 빈자리를 조선족들이 메운 것이다.
조선족들은 한국에 돈 벌러 온 사람들이다. 옛날 구로공단 공장 노동자들이 돈 벌러 시골서 상경한 사람들이었다면 조선족들은 돈 벌러 중국서 온 사람들이다. 1992년 한중 수교와 함께 본격화된 한국 이주는 수많은 성공 스토리와 실패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한국서 번 돈으로 고향에 빌딩을 몇 채 올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몇 년 고생 끝에도 돌아갈 비행기 삯이 없어 속을 태우는 사람도 있다.
조선족들이 가리봉으로 몰려든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서울에서 방값이 제일 싸기 때문이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 15만 원짜리 사글셋방은 이곳 말고는 서울 어디에도 없다. 옛날에 공장 노동자들이 다닥다닥 붙어살던 벌집엔 조선족들이 꾸역꾸역 모여 살고 퇴근길 공장 노동자들로 흥청거리던 가리봉 밤거리는 이제 고된 하루의 노동을 한잔 술로 풀려는 조선족들로 휘청거린다.
가리봉은 조선족들에게는 해방구다. 여기서는 거만한 한국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 중국말과 조선족 사투리를 섞어 마음껏 떠들어도 아무도 이상하게 쳐다보지 않고 고향 음식을 한 상 푸지게 차려 먹어도 무슨 그런 음식이 다 있느냐고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다. 심지어 자신들을 무시하는 한국정부와 한국사람 욕을 해도 괜찮다. 가리봉은 식당에도 가게에도 길거리에도 조선족 천지다.
많은 조선족은 자신의 고향이 중국이라고 강조한다. 천신만고 끝에 조상 땅이라고 찾아온 자신들에게 설거지나 시키고 단순 노무자로 부리며 멸시하는 고국의 동포들에게 실망한 조선족들은 자신들을 재미교포나 재일교포와 같은 재중교포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여전히 이들을 돈벌이하러 와서 더부살이하는 못 배운 아주 먼 시골 친척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래서 많은 조선족은 빨리 돈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가게나 하며 마음 편히 살고 싶어 한다. 조선족 200만 전체 인구 중 1/4이 넘는 사람들이 지금 한국에 살고 있고 이들에게 가리봉은 고향 비슷한 곳이다.
FESTIVAL & AWARDS
2013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
2013 제32회 벤쿠버국제영화제
2013 중국항주아시아영화제
2013 중국시안국제영화제
DIRECTOR

박기용
STAFF
연출 박기용
제작 박기용
촬영 박기용
편집 박기용
PROGRAM NOTE
<가리봉>은 이산과 이주를 테마로 한 공간에 대한 기록이다. 흥미로운 것은 어떤 외부적 시선의 매개도 없이 장소의 미시적 기록에만 몰두한다는 점이다. 1970년대부터 1990년까지 공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던 가리봉은 오늘날 조선족 타운으로 변모하였지만 방외자들의 집산지라는 공간성은 변하지 않았다. 메트로폴리스 서울 안에 있지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한없이 낯설어 보이는 풍경 이미지이다. 직업 소개소와 중국 식품점, 조선족들의 집단 거주지, 골목, 경로당을 경유하면서 가리봉은 흡사 거대한 수용소처럼 그려진다. 한국인과 외국인의 경계에 놓인 이들의 실존적 억류 상태는 해진 운동화나 눈 맞은 자전거, 일자리 광고판에 다닥다닥 붙은 광고지들로 형상화되고 있다. 흔한 인터뷰나 레퍼런스 푸티지에 대한 의존 없이 <가리봉>은 이미지와 소리의 채집만으로 이루어진 ‘에세이 영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타자(他者)의 삶을 접촉하고 이해하는 과정의 난망함을 잘 알고 있다는 듯 박기용 감독은 어떤 특권적 관점도 채택하지 않은 즉물적 양식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피사체의 진실에 다가가기 위한 수단으로 도입한 몰래카메라의 방식은 냉정한 기계장치인 카메라의 권능을 십분 절감하게 만든다. 대다수의 쇼트가 정물화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부동의 자세로 버틴다. 쇼트의 간격과 리듬도 수십 년 간 변하지 않은 그곳의 아이덴티티를 반영하듯 느리고 둔중하다. <가리봉>의 미학적 태도는 민속지적인 기록과 공간에 대한 탐사의 경계쯤에 놓이게 될 것이다. 판단 중지를 본령으로 하는 다큐멘터리의 전통 원칙을 고수하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가 미학적 결벽증을 통해 도달하는 것은 자기 안의 타자를 들여다보는 것의 생경함이다.
장병원/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