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

서울독립영화제2017 (제43회)

선택단편

이정식 | 2017 | Experimental | Color | DCP | 17min 16sec (E)

SYNOPSIS

그는 하나의 책이 되었다.
사람이 책이었던 시대, 문자가 아닌 말로 문화를 유지시키고 발전시켜왔던 시대의 책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말하고 들려주고 종이로 상징되는 그의 몸을 파쇄 한다.
말하기가 끝나고 파쇄 되어 사라진 그의 삶은 소통에 최적화된 순수한 음성, 울림, 말로 돌아간다.
그의 이야기를 들었던 이들이 형태가 사라진 한 사람의 삶을 타인에게 말하고 듣게 하는 일을 가능하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DIRECTING INTENTION

진실 된 목소리는 힘이 있다. 이 힘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며 낯선 이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키우기도 한다. 관객들이 이 작품을 통해서 낯선 질병에 대해, 낯선 소수자의 삶에 대해 사유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목소리를 담고자 했다.

FESTIVAL & AWARDS

World Premiere

DIRECTOR
이정식

이정식

2013 <샘솟는 기쁨>

2015 <요코하마에서의 춤 2008>

STAFF

연출 이정식
제작 이정식
각본 이정식
촬영 김형주
편집 김형주
조명 김형주
음악 홍초선
미술 이정식
출연 이정식

PROGRAM NOTE

하얀 방 안에 하얀 의자와 책상, 책상 위에 검정 크레파스와 볼펜, 그리고 책상 옆에 파지기 하나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남자가 들어와 책을 펴든다. 그러나 책에는 활자가 없다. 활자를 대신해 남자의 목소리가 이야기를 채운다. 남자는 타인의 욕망의 대상이 된 아름다운 자신을 천사라고 명명한다. 그러나 이내 남자는 자신을 지옥불로 떨어트려 달라고 기도한다. 하얀 종이 위는 검정 크레파스와 볼펜이 만들어내는 거친 선으로 채워지고 다시 파지기로 보내져 산산조각이 난다. 남자가 언급하는 게이 사우나는 언제나 들어설 때면 왠지 모를 “수치심을 불러일으키지만”, 혐오의 시선을 피해 남자가 욕망을 충족하는 장소다. 영화는 지속해서 희열과 절망, 정돈된 이미지와 파괴의 이미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모순되고 분열된 자아를 보여준다. 남자는 잠시 뒤 자신이 HIV 보균자라는 사실을 고백하며 자신이 마주하게 된 고립감과 두려움을 호소한다. 욕망의 금지, 혐오의 시선, HIV라는 낙인에 노출되며 살아온 주체에게 분열은 체화된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파괴와 죽음 충동, 욕망과 생명에 대한 의지가 뒤섞인 불안함을 재현해내며 ‘파국의 안위(安危)’를 향해 나간다.

배주연 / 영화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