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사의 제전
서울독립영화제2024 (제50회)
독립영화 아카이브전
하길종 | 1969 | Experimental | B/W | 16mm - DCP | 32min
TIME TABLE
11.30(토) | 14:00-14:51 | CGV압구정(신관) ART1관 | CT, 15 |
12.6(금) | 17:50-18:41 | CGV압구정(신관) ART1관 | 15 |
SYNOPSIS
병사가 관을 들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는 살인죄로 기소되고, 사람들은 그의 죄를 심판하기 시작한다. 병사의 자백이 이어지고, 그의 결백을 증명해 줄 여자가 나타난다. 여자의 증언대로라면 병사의 죄는 그녀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 하지만 사랑이 무덤가에서 이루어져서일까 혹은 사랑이 죽음을 이미 내포하고 있어서일까, 죽음의 신이 찾아와 그들에게 죽음을 선사한다. 이에 뒤질세라 생명의 신도 그들을 찾아와 생명을 선사한다. 이제 재판장은 남자, 여자, 죽음, 생명이 난립하는 난장판으로 변한다. 배심원들은 이 난장판에 불만을 품기 시작하고 재판관도 혼란스럽다. 과연 병사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무엇보다 병사가 죽인 사람은 도대체 누굴까?
DIRECTOR
하길종
1972 화분
1974 수절
1975 바보들의 행진
1977 한네의 승천
STAFF
연출 하길종
제작 하길종
각본 하길종
촬영 하길종
PROGRAM NOTE
하길종 감독의 UCLA 대학원 졸업작인 <병사의 제전>은 전설로 남아 있는 영화였다. 감독 사후 사라졌던 필름이 2009년에 기적처럼 발견되었지만, 사운드가 소실된 상태였다. 그 후 사운드도 1/3 정도 복원되었고 4K 해상도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온전하지 않다. 젊은 날 박평식은 이 영화를 소개하면서 “교수대에 매달린 사형수 얼굴을 클로즈업하면서 영화가 시작된다.”라고 했는데, 지금 복원한 필름은 사형수가 도망가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 제목도 없고 감독의 각인도 없다. 무엇보다 지금 버전이 하길종이 연출한 버전인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하길종이 쓴 시나리오와 비교하면 전혀 다른 영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시나리오에는 서사가 명확하지만 지금 버전은 편집이 너무 급격해 스토리를 느끼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젊은 하길종의 패기가 강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면, 새로운 영화에 대한 쾌감을 맛볼 수 있는 동시에 실험영화의 해석이라는 문제에 고민하게 된다.
대학 시절인 1962년에 초현실주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는 하길종은 <병사의 제전> 역시 초현실주의 풍으로 만들었다. 이 말은 현실을 넘어서는 또 다른 현실을 영화 속에 그렸다는 말인데, 그렇게 영화 속에 그려진 초현실은 의식을 토대로 하지만 의식을 넘어서는 상징과 은유로 가득하고, 여러 상황이 동시에 전개되면서 수시로 인서트 컷이 개입해 들어온다.
내가 보기에는 하길종이 살아생전 서구 영화를 열심히 소개할 때 특별히 좋아했던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특히 <제7의 봉인>과 <산딸기>의 영향이 짙게 배어난다. ‘죽음’이 캐릭터로 등장하고, 마법사가 체스를 두는 장면이 영화 속에 오롯이 살아 있으며, 자신의 죽음과 만나는 관의 모티프나 재판 설정도 그렇다. 영화는 재판받는 병사의 특별한 의식(ritual)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형장에서 도망가 닿은 바닷가에서 시작된 초현실적 상상이 공동 묘지의 섹스로 연결되다가 차가운 재판정으로 이어진다. 여성의 상징을 해석하지 못한 이들의 의견이 분분하다가, 결국 병사와 ‘죽음’이 하나가 되어 춤을 추고 마법사도 함께 춤을 추면서 병사의 관을 떠나보내고, 죽은 병사도 자신의 눈으로 그것을 본다. 차가운 배심원이 문명의 옷을 벗고 히피적 복장으로 관을 매고 저 멀리 사라지는 풍경을 통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알린다.
죽음과 삶, 소멸과 탄생, 어두움과 밝음, 남성과 여성, 문명(재판)과 자연(누드), 배척와 관용 등 숱한 문제를 1960년대 중후반 미국을 지배한 히피의 자유분방한 사상 속에 담았다. 흑인운동이나 페미니즘 등이 직접적으로 들어 있지는 않지만, 병사의 재판과 무덤을 통해 미국의 반전 의식과 현실을 비판한다. <병사의 제전>은 세련되거나 매끈하지는 않지만 도발적인 구성과 가끔씩 등장하는 매력적인 장면이 보는 이의 시선을 강하게 사로잡는 영화이다.
강성률 /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