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그 길에서
서울독립영화제2006 (제32회)
장편경쟁
황윤 | 2006 | Documentary | DV | Color | 97min
SYNOPSIS
도로 갓길에는 장갑, 신발, 음료수 병, 과일 껍질 등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 버린 물건들 옆에는, 바로 몇 분 전까지 인간처럼 붉고 뜨거운 피를 가졌던 하나의 생명이 걸레처럼 나뒹굴고 있다. 그것은 건너편 숲으로 가고 싶었던 토끼였고, 건너편 옹달샘으로 가서 물을 마시고 싶었던 고라니 가족이었다. ‘인간’이라는 포유동물과 그 동물이 소비하는 온갖 물건들의 빠른 이동을 위해 고안된 도로에서, 먼지처럼 사라지는 생명들의 종(種)과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고, 오히려 은폐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도로는 ‘대지의 거주자들’의 거주지를 침탈하며 계속 확장되고 있다. 태영, 천권, 동기는 국내 최초로 본격적인 로드킬(Roadkill, 야생동물 교통사고) 조사를 한다. 그들은 조사를 위해, 나는 촬영을 위해, 차들이 질주하는 위험한 도로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DIRECTING INTENTION
대지의 거주자들. 어쩌면 난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하는 선무당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넋을 불러 마이크를 들이대고 인터뷰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다. 그럴 수 없기에 대신, 나는 그들이 사고를 당하기 직전 무엇을 하려고 했었고, 그들에게 어떤 욕구가 있었으며, 그들이 인간들의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될 때 무엇을 느꼈을까, 그들에게 자동차라는 물건은 어떻게 보일까 등등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단순히 야생동물 보호를 외치는 영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들을 ‘야생동물’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그들을 ‘인간 이외의 것들’ 로 싸잡아 대상화하는 것 같아 피하고 싶었다. 이 거룩한 대지에서 나와 함께 태어나 살아가는 자매이고 형제인 ‘대지의 거주자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직접 이야기하도록 하고 싶었다. 이 땅에 깊은 상처를 내고 그 땅의 오래된 거주자들을 소수자, 약자, 그리고 멸종의 단계로 파멸시켜 가는 동안, 인간은 단 한번이라도 허락을 구한 적이 있었던가? 도로라는 구조물을 전속력으로 달려, 우리가 다다르게 될 곳은 어떤 곳일까?
FESTIVAL & AWARDS
제3회 서울환경영화제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제6회 인디다큐페스티발
제32회 서울독립영화제
제4회 대구평화영화제
제3회 부안영화제 개막작
DIRECTOR

황윤
2000 <겨울밤
이야기를 듣다>
2001 <작별>
2004 <침묵의 숲>
STAFF
연출 황윤
제작 황윤
각본 황윤
촬영 선환영, 황윤, 김이찬
편집 황윤
조명 선환영
음향 사운드믹싱-표용수
출연 팔팔이, 대지의 거주자들, 최태영, 최천권, 최동기 등
컴퓨터그래픽 정원석
스틸 장문정
작곡 강경한, 엘사
보컬 엘사
PROGRAM NOTE
<어느날 그 길에서>는 러닝타임을 견뎌내기 힘든 영화이다. 까닭은 영화 내내 길 위에서 짓이겨 죽어간 수많은 생명들의 ‘로드킬’을 대면해야하기 때문이다. 자동차로 도로를 질주하며 보았던, 형체를 구분하기 힘든 검은 쓰레기들이 방금 전까지 숨을 쉬며 붉은 피를 지녔던 토끼, 고라니, 삵 혹은 아주 작은 새라고 생각해본 적 있는가? ‘높고 깨끗하고 안전하고 빠른’것들을 추구하며 그 안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모두가 함께’ 행복하다고 최면을 걸고 있다. 인간의 이기로 과잉되게 건설되는 도로위에서 여린 생명들을 자동차로 밟고 달아나듯, 잔인한 현실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회피하고 있다. ‘모두가 함께’행복하다는 생각은 분명 존재하는 비참한 그들의 죽음을 대면하지 않고 망각하는 것에 기인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황윤 감독은 우리가 주저 없이 칭하는 ‘야생동물’이라는 단어에 대해 고찰하며 그들을 ‘대지의 거주자’라 부른다. 말없이 죽어간 ‘대지의 거주자’들과 소통할 수만 있다면 영매라도 되고자 하는 감독의 마음은 그들의 시점으로 보이는 자막에서 간절히 드러난다. 영화를 통해 우리는 더욱더 빠른 것을 추구하는 초고속주의와 폭압적인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에 앞서 생명본연의 존귀함에 대한 기본적인 도덕성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로드킬’을 막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도로 위를 살피는 세 명의 조사관과 ‘대지의 거주자’들을 묵묵히 담아낸 이 영화는 소중한 보고서이며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사고의 전환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지연 / 한국독립영화협회 사무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