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진혼곡
서울독립영화제2019 (제45회)
독립영화 아카이브전
김소영 | 1985 | Fiction | B/W | DCP | 15min (E)
SYNOPSIS
태양이 마지막 자기의 빛을 거둬들이는 시각”
소녀가 “어둠 속에서 관능을 감각하고 죽음을 지켜보았다” 고 작가는 쓴다.
<완구점 여인, 오정희> 이 영화로 바뀌었고 소녀와 여인의
성애는 레퀴엠의 리듬을 얻는다. 포지(positive)가 네가 (Negative)로 바뀌는 순간의 전율은 그러니 시네마의 관능이다 .
소녀와 여인에게 보낸 퀴어 실험 영화 <푸른 진혼곡>
DIRECTOR
김소영
2000 <거류>
STAFF
연출 김소영
진행 남만원
촬영 이상모
조명 최성식
출연 김선미, 유쏘냐, 이상훈
PROGRAM NOTE
작가 오정희의 등단작 「완구점 여인」(1968)을 차용한 <푸른 진혼곡>(1985)은 에로스와 타나토스의 세계와 불화하는 소녀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내밀한 고백이다. 소녀의 내면은 때론 과감한 성애적 관계로 외화 되기도 할 테지만 그 기저에는 절망과 죽음의 기운이 짙게 배어있다. 소녀의 이야기는 모두가 떠나버린 어둡고 텅 빈 교실에서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한없이 연약하고 더없이 고독한 이야기다. 소녀의 세계는 다리가 불편한 문방구 주인 여자의 세계와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픈 남동생의 세계를 오간다. 소녀는 저녁마다 문방구에 들러 작은 종을 산다. 종은 소녀가 문방구에 갈 이유가 돼주고 낙담한 동생에게 전할 작은 즐거움이다. 이들 남매에게는 임신한 계모가 있다. 소녀의 눈에 비친 (쉬지 않고 아이를 갖는) 계모의 불룩하게 부풀어 오른 배는 불온하고 의뭉스럽다. 그 배를 볼 때면 소녀는 자신의 세계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절망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소녀가 동생에게 닥친 불행(아마도 죽음)을 목격한 직후, 우리는 소녀와 문방구 여자 사이의 성애적 순간을 목격한다.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여성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이끄는 듯한 소녀의 과감하고 도발적인 몸짓. 영화는 이 순간을 양화에서 음화로 전환하며 이들의 관능의 순도를 순식간에 높여버린다. 모로 나란히 누운 그녀들의 육체는 앙리 마티즈의 그림 속 그 단순하고 명쾌한 육체의 덩어리처럼 보일 정도이고 그녀들의 섬세한 육체의 움직임은 네가 필름 속에서 아름답고 고혹적인 암화(暗花)로 드러난다. 이어 영화는 그녀들의 얼굴로 과감히 클로즈업해 들어간다. 그리고 느닷없이 그녀들의 내면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전까지 그리고 이후에도 소녀 외의 다른 인물들에게 목소리를 허락하지 않던 영화가 갑작스레 문방구 여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여인의 무표정한 얼굴과 함께 그녀가 전하는 이야기는 하나같이 지나가 버린 과거의 바람과 좌절된 꿈에 관한 것이다. 여인의 대구로서 클로즈업된 소녀의 얼굴 위로 소녀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마찬가지로 더는 기대할 게 남아 있지 않은 소녀의 깊은 절망의 이야기다. 에로스의 절정의 순간에 그 짝패처럼 맞붙어 있는 절망의 시퀀스.
<푸른 진혼곡>은 소녀의 사랑의 향방과 소녀의 갈망의 근원을 단순화하지 않으려는 자세를 견지한다. 이를테면 소녀가 문방구 여인에게 편지를 쓸 때 들려오는 곡은 <따오기>. 이 노래 특유의 애상의 정조가 영화의 무드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귀를 사로잡는 건 노랫말이다.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내 어머니 가신 나라 해 돋는 나라.’ 성애 장면에 이어 소녀가 여인에게 편지를 쓰는 바로 그 순간에 어째서 영화는 ‘어머니’의 죽음, 이별, 부재를 예감하게 하는 노래를 삽입한 것일까. 그렇게 소녀의 갈망과 욕망의 대상은 문방구 여인과 어머니 모두를 포함하며 그것은 구분하기 힘든 감정이 돼 소녀의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이다.
정지혜(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