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영화를 보면 언제나 겸허해집니다. 제49회 서울독립영화제의 단편경쟁작들을 보며 심사를 한다기보다는 큰 호사를 누리는 느낌으로 작품들을 만났습니다. 빨리 휘발되고 소비되는 ‘콘텐츠’들의 범람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지닌 작품을 만나는 것은 참 귀한 경험이었습니다. 각기 고유한 목소리와 속도로 말을 건네는 작품들 속에서, 영화를 보는 내내 따뜻한 무언가가 극장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심연을 응시하며, 판단을 유보하는, 경계의 꽃밭에서 피어난 그 목소리들은, 쉽게 휘발되지 않고 관객을 더 깊은 사유의 장으로 초대했습니다. 그 장 안에서, 우리가 영화를 통해 대화를 나눈 것 같았고 귀한 작품을 세상에 나눠 주신 감독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올해의 단편 대상은 서새롬 감독의 <스위밍>입니다. 탁월한 것을 볼 때 우리는 그 탁월함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스위밍>은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뽑힌 작품입니다. 모든 것이 공유되는 현재의 관심/공유 경제를 넘어 미래에는 무엇이 더 ‘공유’될 것인가. 이 작품은 생경한 아랍어 내레이션과 함께 그것이 무의식이라 답합니다. 우리는 크고 작은 고민 속에서 과연 내 머리 속 생각이 나의 생각인지, 타인의 생각인지, 사회의 부산물인지 아니면 그 모든 조각들의 총합인지 분리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스위밍>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점유한 사회적 프로그램과 공유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독특한 시각언어로 번역하여 드러냅니다. 또한, 성실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어쩌면 도래할 지도 모를’ 근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이 놀라울 뿐 아니라, 복잡한 개념을 쉽게 전달하는 예술가의 문법 또한 빛났습니다. 저희는 대상을 선정하며, 이 상이 감독님의 다음 작업에 초석이 되길 바랐고, 이 단편을 시작으로 <스위밍> 시리즈의 대장정이 이뤄지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단편 최우수작품상은 박지인 감독의 <매달리기>입니다. 이 작품은 사려 깊은 연출 속 배우들의 진실한 연기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전작 <전학생>, <연습생> 등을 통해 인물의 깊은 내면을 드러내는 감독님의 연출 강점이, <매달리기>에서는 더 폭발적으로 발휘해 큰 감정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합니다. “영화라는 매체가 결국 다른 이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하신 감독님 인터뷰처럼, 이 작품을 통해 보호 종료 후 자립을 준비 중인 영선의 생일날을 마치 함께 보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특히, 엔딩 장면은 삶과 생명에 대한 찬가처럼 세계를 품어 안으며 가슴 속 깊은 무언가를 건드렸습니다. 삶을 불신하고 회의하는 것은 어쩌면 쉬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실로 어려운 것은 불가해한 고통 속에서도 빛나는 무언가를 기어이 발견하는, 그 영적인 사랑의 응시라 생각합니다. 감독님의 귀한 응시와 목소리에 감사하며 다음 작품을 힘차게 응원합니다.
단편 우수작품상은 서주희 감독의 <마우스>입니다. 우리는 가장 두려운 ‘죽음’을 우리의 삶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고 싶습니다. 하지만 가만 보면 언제나 죽음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 있습니다.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인간 동물과 인간의 위계 사이에서 고뇌하는 이 영화는 끝내 세상의 모든, 죽음의 두려움을 떠안은 존재들이 서로 연대하여야만 ‘삶’을 지속시킬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단편영화로서의 시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놀라운 깊이에까지 가닿은 신비한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서주희 감독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고 응원하겠습니다.
특별언급은 조한나 감독의 <퀸의 뜨개질>입니다. 가족 내에서 얼굴도, 성격도 가장 닮았다고 하는 할머니 춘자와 손주 한나. 사진과 홈비디오로 기록된 가족 내 사적 자료와 한 코, 한 코 떠지며 무섭게 거대해지는 뜨개질의 끝판왕 ‘만다라 매드니스’ 속에서, 혈연과 뜨개질로는 연결되어 있지만 세대와 삶이 다른 두 여성 개인의 역사에 홀린 듯 빠져들게 됩니다. 가장 ‘여성적인 일’로 읽히기 쉬운 뜨개질을 통해 감독은 무엇이든 만들어냅니다. 거대한 남성기, 얼굴에 꼭 맞는 턱수염, 그리고 청소년기에 느낀 수치심을 재연할 인형 배우들까지. 그다지 한결같지 않은 자신의 내/외면을 조한나 감독은 치열하게 뜨고, 풀어 나갑니다. 이렇듯 물성 있는 명상의 과정을 통해 “너의 모든 모습이 너”라고 유쾌하게 노래하는 결말에 큰 위로를 얻었습니다. ‘할머니가 될 때까지 사적 다큐멘터리스트가 되겠다’는 감독님의 말씀 기억하고 기대합니다.
서울독립영화제2023 본선 단편경쟁 심사위원 일동
김보라(영화감독)
이랑(영화감독/가수)
이정홍(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