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2024 본선 단편경쟁 심사평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기쁜 마음으로 미래의 영화들을 만났습니다. 영화제 안팎을 둘러싼 위기론에도 불구하고 올해 단편경쟁 부문에는 무려 1,500편 넘는 작품들이 출품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고, 그중 예심위원들이 밝은 눈으로 선정해 주신 총 27편의 단편들과 마주했습니다. 다양한 스타일과 주제를 지닌 작품들이 대거 출품되어 심사위원들을 즐거운 고민에 빠지게 했습니다. 한땀 한땀 만든 클레이 애니메이션부터 쉼 없이 이어지는 야외 로케이션의 극영화에 이르기까지, 27편의 후보작 모두 어떤 특정한 경향으로 묶일 수 있는 작품들이 없어, 창작자들의 미학적 고민과 세상을 향한 관심의 폭이 넓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길고 긴 토론 끝에, 심사위원들은 송지서 감독의 <유림>을 단편 대상, 이소현 감독의 <아다댄스>를 단편 최우수작품상, 남연우 감독의 <소파가 있는 꿈>을 단편 우수작품상으로 결정했습니다.
대상 <유림>은 추운 밤거리를 헤매는 두 여자 고등학생 유림(김세원)과 선미(유은아)의 이야기입니다. 유림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친한 친구 선미를 적극적으로 도우려 하지만, 정작 선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시종일관 무기력합니다. 임신중절수술을 해야 할 산부인과도 어렵게 찾아야 하고, 수술 비용도 마련해야 하는 두 소녀는 결국 선미와 교제했던 선생의 집을 찾아갑니다. <유림>은 차가운 한 밤 동안 벌어지는, 거의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김세원, 유은아 두 배우의 탁월한 연기와 호흡은 이들의 미세한 심경의 변화, 예측할 수 없는 무드의 흐름 등을 절묘하게 담아냅니다. 그런 가운데 익숙한 리듬과 흐름의 전환까지 보여주며, 어쩌면 흔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소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풍부하고 사려 깊게 만들어낸 <유림>에게,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의 표를 던졌습니다.
최우수작품상 <아다댄스>는 발칙한 상상력의 승리라 생각됩니다. 친구들과 모였다 하면 성(性)적 이야기만 주고받는 분위기 속에서 주눅이 든 주인공은, 용기 내어 자신의 자위 경험을 꺼내 보지만 오히려 자신의 ‘아다’ 딱지는 더 선명해질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 직장 동료와 ‘원나잇’을 하게 되고 더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해방’과 ‘자유’라는 거창한 주제와 맞물리던 성적 담론을 그야말로 유쾌한 판타지로 풀어낸 <아다댄스>는 그 몰입감이 상당합니다. 무한대로 로케이션을 활용하고 톤 앤 매너를 거침없이 변속하는 솜씨는 새로운 재능의 발견이라 할 만합니다. 거의 뮤지컬에 가까운 이 영화를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영화의 주제곡(?)을 흥얼거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수작품상 <소파가 있는 꿈>에서 정연웅, 이한중 배우가 연기하는 두 남자는 오랜 연인입니다. 그들은 이사를 5일 남겨두고 있고, 그렇게 곧 헤어지게 될 예정입니다. 그러다 길에서 발견한 소파를 집에 들이게 되는데, 그 집은 결코 2인용 소파가 들어갈 수 없는 규모의 집입니다. 불편하게 거실을 꽉 채운 소파는 말이 없지만, 이별을 앞둔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그 기억을 저장합니다. 이별의 안타까움과 미련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좁은 거실의 너른 소파로 보여주는 <소파가 있는 꿈>은 담담하게 둘의 마지막 시간을 보여줍니다. 특별한 사건이나 군더더기 없이 떨리는 숨소리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이 작품은 굉장히 긴 여운을 남깁니다.
독립스타상 역시 만장일치로 공선정 감독 <작별>의 연예지 배우를 선정했습니다. 영화에서 이태원 참사로 친구를 잃은 영주(연예지)는 외상으로 대학을 휴학하고, 정신과 치료를 병행하는 동시에 중학생들에게 진로 상담을 해주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치료와 봉사활동이 종료되는 ‘작별’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러닝타임의 많은 시간은 연예지 배우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저 말없이 불쑥 내면에서 솟구쳐 오르는 감정들, 그리고 대화 상대를 향한 반응의 표정 등 연예지 배우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인물의 그것에 진심으로 다가섭니다. 세상 그 어떤 배우도 결코 실제 인물이 될 수 없겠지만, <작별>의 연예지 배우는 진심을 다해 그리고 사력을 다해 진정 그 인물과 손을 맞잡은 것 같은 놀라운 순간들을 만들어냅니다.
대상으로 시작해 최우수작품상과 우수작품상, 그리고 단 한 명의 배우만 수상의 영광을 안겠지만 감독과 배우를 비롯한 출품작 관계자 모두에게 깊은 감사와 격한 격려를 함께 보냅니다. 언제나 지겹도록 회자하는 영화의 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 어딘가에서 여전히 숭고한 열정과 새로운 시선으로 중무장한 젊은 영화인들이 부지런히 자신의 세계와 미학을 넓히고 다져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50주년 이후의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여러분의 다음 작품과 꼭 다시 만나고 싶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2024 본선 단편경쟁 심사위원 일동
김종관(영화감독)
박지완(영화감독)
주성철(씨네플레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