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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2024 새로운선택 장편 부문에 8편의 작품을 선정했습니다. 각 작품의 감독님, 배우분들, 스태프분들 모두에게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도전적이고 과감한 실험을 단행하고 실행을 감행한 흥미로운 다큐멘터리 3편을 소개합니다. 김이소의 <나선의 연대기> 속 인물들은 아파트 분양 사기로 잠이 늘었고, 건물주의 퇴거 명령으로 허망해하며, 그들이 감지하는 시간은 좀처럼 흐르지 않거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합니다. 말로는 잘 설명되지 않는 감정과 감각, 흩뿌려진 기억과 흔적, 완전하지 않은 목격의 시선과 위치가 비선형적인 구조, 마치 나선처럼 움직일 때, 잊히고 누락된 존재의 시간이 어렴풋이 접속하고 되살아납니다. 시간의 구멍을 통해 더 많은 것들이 꿈틀댑니다. 이소정의 <모든 점>은 어느 날 도착한 한 통의 편지와 필름 하나를 시작점 삼아 출처와 정체를 알 수 없는 노이즈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광활한, 어쩌면 우주적인 오디세이입니다. 이때의 노이즈는 비가시적이지만 어디든 존재하는 신호, 물질, 존재. 영화라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세계를 경유해 그 불가해한 것들은 비로소 새로이 감각되고 영생의 가능성까지도 타진해 올지도 모릅니다. 박효선의 <메릴 스트립 프로젝트>는 감독이 일생 사랑해 온 배우 메릴 스트립을 직접 만나 이 극진한 사랑을 전하려는 무모한 모험기, 영화로 쓴 열렬한 러브 레터입니다. 배우이자 페미니스트로서 메릴 스트립이 보여 준 결기와 아름다움을 피력하는 동시에 감독은 자신이 영화를 만들고 페미니스트로 활동하는 이유, 근거를 전방위적으로 그러모읍니다. 이 과정은 자연스레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미투운동, 폭력과 부정, 혐오에 맞서는 뜨거운 투쟁, 그 주체들의 기록이기도 합니다.
서슬 퍼런 유머와 신랄한 감각으로 미스터리한 세계를 길어 올린 5편의 극영화 또한 흥미진진합니다. 안준국, 조현경의 <미션>은 서열화되고 계급화된 한국 사회의 압축판, 입시 지옥도를 극적으로 그려 갑니다. 학교를 술렁이게 만든 의문의 쪽지, 그에 적혀 있는 알쏭달쏭한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살벌한 전쟁, 그 속에 드러나는 욕망의 밑바닥까지. 돈과 권력에 따라 모든 게 결정돼 버리는 이 사회의 비정한 메커니즘이 거듭되고, 인륜을 거스르며, 죽음의 기운이 강하게 감지될 때, 이곳은 예비된 지옥의 다름 아닙니다. 최종룡의 <수연의 선율>은 작디작은 아이들이 실은 날카롭고 복잡하며 거대한 세상, 그 불가해한 세계를 가장 잘 꿰뚫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줍니다. 혼자가 된 아이가 겉으로 보기에 완벽해 보이는 가족으로 편입하려 하지만 정작 그 안에서 자신보다 더 연약한 아이를 보며 느끼는 모종의 동질감 내지 책무는 어른들의 세계를 향한 매서운 질문으로 되돌아옵니다. 아이들 특유의 무해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면면을 세밀히 그리는 솜씨가 감정의 반전을 거듭하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정해일의 <언니 유정>은 영아 유기 사건의 당사자임을 스스로 밝힌 동생 앞에서 언니가 느끼는 당혹과 낯섦을 집요하게 파고듭니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알지 못한 상대, 그와의 관계를 재고하는 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의 드라마가 됩니다. 첨예하고 논쟁적인 사건을 선정적인 방식이 아닌 내밀한 심리극으로 유려하게 풀어냅니다. 이종수의 <인서트>는 시종 괴상한 유머, 리듬, 몸짓으로 영화 현장과 영화 그 자체를 풍자하고 비트는 골계미가 압권입니다. 어정쩡하다가도 벼락같이 파고드는, 예측은 일절 허용하지 않는 전개가 일품이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배우들의 기질과 기세가 절묘합니다. 호방한데 끝내 처연해지는 실패한 사랑 이야기 앞에서 웃다가 울어 버립니다. 이한주의 <파동(波冬)>은 시차를 두고 같은 곳을 방문하는 두 인물을 통해 이상하고 기묘한 시간 여행에 동승하게 만듭니다. 서로의 흔적은 교차하고, 현실과 꿈, 기억과 환상의 경계는 아슬아슬하게 만나는가 하면 이내 미끄러지기를 거듭합니다. 끝내 완벽하게 하나가 될 수 없는 두 세계를 지켜보는 일은 서글프고, 환영 같은 두 세계가 어스름하게 서로를 느낄 때, 도리어 강력하게 그곳에 뭔가가 있음을 감지하는 일은 신묘합니다.
이들 영화가 품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영화제 기간 관객들과 만나 더 깊이 진동하고, 발견되고, 발화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서울독립영화제2024 예심위원회 (가나다순)
김영우(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래머)
모은영(영화평론가)
송경원(씨네21편집장)
정지혜(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