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을 버텨 내고 마침내 영근 열매는 더욱 달고 향기롭습니다. 영화의 입지는 날이 갈수록 좁아지고, 독립영화의 토양을 망치려는 움직임마저 안팎으로 감지되고 있는 상황이지만 영화를 향한 애정 어린 마음은 멈출 수 없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에 모인 영화들은 한마음으로 뭉친 열망의 소중한 증거입니다. 2024년 서울독립영화제 본선 장편경쟁 부문에 출품된 199편의 영화는 한결같이 영화를 향한 애정과 존경을 품고 있었습니다. 이를 마주한 심사위원들도 그 솔직하고 맑은 목소리들에 감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작품을 많은 관객들에게 선보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오랜 토론과 논의 끝에 12편의 영화를 선정하였습니다.
올해는 다채로운 극영화가 눈에 띄는 가운데 다큐멘터리, 실험영화를 넘나드는 흥미로운 작품들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심사위원들도 가급적 극, 다큐, 실험 등 다양한 분야를 고루 선보일 수 있도록 노력하였습니다. 박송열 감독의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는 창작가의 세계가 한층 견고해지고 확장된 형태로 자기 구원의 길을 찾는 작품입니다.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이제한 감독의 <환희의 얼굴>, 강미자 감독의 <봄밤> 등 두 번째 작품을 완성한 감독들의 도약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이 올해의 주요한 경향 중 하나입니다. 노동 문제에 천착해 온 이란희 감독의 <3학년 2학기>는 조금은 일찍 세상을 만난 아이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과 여전한 감독의 진심이 돋보였습니다. 조희영 감독의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가 특유의 유려함과 우아함을 견지하면서도 한층 과감해진 면이 매력적이었다면 이제한 감독의 <환희의 얼굴>은 정갈하고 말간 얼굴로 이야기의 품을 넓힙니다. 강미자 감독이 16년만에 들고 온 극영화 <봄밤>은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이미지만이 성취할 수 있는 시적 깊이를 보여 주며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한편 흥미로운 시도가 돋보이는 데뷔작도 있습니다. 이승재 감독의 데뷔작 <허밍>은 삶과 죽음, 현실과 영화의 경계를 스르륵 허물며 새 길을 모색하고, 신인기 감독의 <비트메이커>는 판소리와 힙합, 전통과 현대의 만남 속에 청춘의 고민을 다루며 공감을 더합니다.
올해는 극영화 외에도 주목할 만한 작품들이 많았습니다. 다큐멘터리와 극을 경유하며 특유의 세계를 선보여 온 정재훈 감독의 <에스퍼의 빛>은 영화의 안과 밖, 형식의 경계를 허무는 급진적 시도와 관점을 선사합니다. 기발한 상상력과 유머 속에 주체와 객체의 뒤바뀜, 사물과 인간의 전도를 이야기하는 박지윤 감독의 <(환영합니다) 난초의 행성입니다>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영화의 영토를 넓히는 다채로운 시도에 박수를 보냅니다. 허범욱 감독의 <구제역에서 살아 돌아온 돼지>는 오랜만에 찾아온 뚝심 있는 장편 애니메이션입니다. 어둡고 무게 있는 주제를 본인만의 색으로 끝까지 밀고 가는 힘은 근래 찾아보기 힘든 소중한 가치입니다. 해외입양인들이 뿌리를 찾는 여정을 따라가는 조세영 감독의 <K-Number>에서는 부조리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으면서 집요하게 진실을 파고드는 힘을 엿볼 수 있습니다. 박민수, 안건형 감독의 <일과 날>은 노동 앞에 평등한, 평범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맑고 간결한 태도로 전하는 단단한 시선이 보는 이를 사로잡습니다.
위기는 때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할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영화산업 전반의 침체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둘러보면 이전보다 한층 단단하고 다양해진 영화들을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엄혹한 상황이라서 더 맑아진 목소리들, 한국 영화의 진짜 얼굴을 증명할 영화들을 마주하며 새삼 용기와 희망을 얻습니다. 이 모든 작품들을 소개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아쉽게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에 무한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우선 전합니다. 동시에 선정된 12편의 독립영화가 2024년의 쌀쌀함을 사람을 향한 온기와 영화를 향한 열정으로 가득 채워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2024 본선 장편경쟁 부문 예심위원 (가나다순)
김영우(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래머)
모은영(영화평론가)
송경원(씨네21편집장)
정지혜(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