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2024 서울독립영화제는 ‘역사적’ 시간이었습니다. 50주년이라는 경사를 맞이했지만, 한편으론 중단의 위협 속에서 영화제를 치러야 했습니다. 한국영화가 위기를 겪고 있으며, 독립영화의 영토 또한 점점 지키기 힘들어지는 상황에서, 서울독립영화제는 반세기 만에 가장 큰 위험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영화제 폐막을 3일 앞둔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23분, 계엄이 선포되었습니다. 계엄은 6시간 만에 해제되었지만, 이후 우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야 했습니다. 탄핵과 대선. 2025 서울독립영화제는 ‘빛의 혁명’을 통해 ‘다시 만난 세계’에서 치러집니다.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흩어졌던 모든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풍경. 그 안에서 영화제의 공적 지원도 회복되었고, 올해도 ‘역대 최대 출품작 수’를 기록했습니다. 매년 맞이했던 루틴이 새삼 소중하다는 걸 느꼈던 시간이었고, 215편의 장편 출품작 중 12편의 경쟁 부문 상영작을 선정하는 작업은, 그러한 작은 감동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먼저 두 편의 다큐멘터리는 한국을 대표하는 다큐 감독들의 여전한 내공을 만날 수 있는 시간입니다. 김태일주〮로미 감독의 <이슬이 온다>는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는 탄광이라는 공간으로 들어갑니다. 먹고 살기 위해 탄을 캐는 광부의 삶과 사연을 담아내는 작품은 새롭진 않지만 정공법으로 ‘다큐의 가치’를 실현합니다. 김일란 감독의 <에디 앨리스: 테이크>는 트랜스젠더인 에디와 앨리스, 앨리스와 에디 두 사람이 겪는 정체성 변화의 과정을 담아냅니다. 감독 특유의 꼼꼼한 카메라는, 두 주인공의 내면과 외면을 감각적으로 담아냅니다. 애니메이션으로는 김보솔 감독의 <광장>이 있습니다. 감시 사회 북한에서 외국인과 북한 여성이 금지된 로맨스를 나누는 이 영화에서 감독은, 첫 장편임에도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와 정서를 보여줍니다.
아홉 편의 극영화엔 최근 독립영화의 점점 다채로워지는 스펙트럼을 담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박세영 감독의 <지느러미>는 심각한 환경 오염을 겪고 있으며 남북 통일이 되었지만 혼란스러운 미래의 한국을 배경으로 하는 일종의 SF입니다. <다섯 번째 흉추>에 이은 두 번째 장편으로 감독 특유의 질감은 여전하면서도 새로운 세계관을 시도합니다. 이원영 감독의 <미명>은 계엄 전후의 상황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겪은 사적 비극과 내면적 고통을 드러냅니다. 사고로 아내를 잃은 후 목소리를 상실한 남자의 이야기는 관객을 낯선 곳으로 이끌고 갑니다.
이제한 감독의 <다른 이름으로>는 서사의 실험이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작년 <환희의 얼굴>에 이어 올해도 경쟁 부문에서 관객과 만나는 감독은, 데칼코마니처럼 겹쳐지는 이야기 속에서 차이와 반복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라는 것이 지닌 매혹을 드러냅니다. 반면 최승우 감독의 <겨울날들>은 서사를 최대한 절제하고, 겨울이라는 시간과 반복적으로 동선을 오가는 인물들을 보여줍니다. 한 계절을 견디며 서울이라는 공간에서 서식하는 젊은이들의 이미지는 황량합니다. 감정원 감독의 <별과 모래>는 공간을 중심으로 조금씩 쌓아가며 전개되는 남녀의 관계 혹은 로맨스입니다. 최근 독립영화의 중요한 화두인 로컬 시네마의 성과가 될 작품입니다.
10대 청소년들의 삶과 현실은 올해 출품작 중 상당한 지분을 지니는 테마였습니다. 박석영 감독의 <레이의 겨울방학>은 일본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과 일본의 소녀들이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귀엽게 소통하는 이야기입니다.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훨씬 가볍게 인물에 접근하면서도, 그들의 마음을 담아내려는 카메라의 진심은 여전히 울림을 줍니다. 유재욱 감독의 <산양들>은 ‘고 3’인 네 소녀가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하지만 실패하는, 그럼에도 자신들의 여정을 이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경구를 새삼 떠올리게 하는 네 주인공에게 응원을 보냅니다. 손경수 감독의 <아코디언 도어>는 성장 영화의 새로운 형식입니다. 트라우마를 판타지 상황과 결합시키고 여기에 현실을 결합시킨 이 영화는, 10대를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스러운 결을 드러냅니다.
200편을 넘긴 출품작 중 12편의 경쟁 부문 상영작을 고르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지만, 아울러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에게도 뜨거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12편의 작품을 통해 관객들이 최근 한국 독립영화의 진수를 경험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한 차례 큰 고비를 경험한 한국 사회와 서울독립영화제 모두, 새로운 국면에서 새로운 성취를 거두길 바랍니다.
서울독립영화제 2025 본선 장편경쟁 부문 예심위원(가나다순)
김영우(서울독립영화제 프로그래머)
김형석(영화 저널리스트)
남다은(영화평론가)
모은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