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독립영화제2020 본선 장편경쟁 부문 예심 심사평


 

2020년 서울독립영화제 장편경쟁 부문에는 역대 최다인 총 143편이 출품됐습니다. 혼란과 환란의 시대에도 영화를 향한 창작자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음을 다시금 확인했고, 울퉁불퉁하지만 좀처럼 퇴색하지 않는 방식으로 자기 앞의 세계와 마주하려는 용기 어린 영화를 만났습니다. 전반적으로 작품 간 편차는 컸고 극영화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애니메이션, 실험영화 등으로 분류될 만한 작품은 희소했고 각기 다른 이유와 지점에서 감동을 전하는 다큐멘터리의 강세가 확연했습니다. 최근 몇 년간 유의미한 테마로 묶이곤 했던 여성, 가족, 사적 서사는 예년과 달리 그 기세가 다소 누그러진 듯했으며 일별을 허락지 않는 방대한 영화들 앞에서 경향성이라는 말은 무력해 보였습니다. 4인의 심사위원은 두 차례에 걸친 심사 과정을 거쳐 12편의 영화를 최종 선정했습니다. 세상에 먼저 도착한 영화들의 영향에서 비켜서서 자신의 영화적 상상력을 과단성 있게 밀고 나가거나, 단단하게 영화의 중핵을 파고들며 제 심도를 높이는 영화들에 주목했습니다.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고유하고 뚜렷한 결을 지닌 12편의 영화, 열두 가지 세계입니다. 
극영화가 7편입니다. <더스트맨>은 언뜻 연결점을 찾기 어려운 듯한 미세먼지, 홈리스, 예술가라는 소재를 잘 잇고 빚어 완성된 드라마입니다. 비가시적이고 무용하다고 치부돼 온 존재가 어떻게 가시화되고 쓸모 있으며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할 수 있는가를 그립니다. <방문객들>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홀연히 묶인, 완벽한 타인들이 함께하게 된 어느 날들을 가만히 지켜봅니다. 설핏 예삿일처럼 보이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하나 어느새 그들 마음에는 설명되지 않는 잔상이 일고 그 발생이야말로 이 영화가 주목하는 것임을 끝내 납득하게 합니다. <빛과 철>은 심리적, 장르적 긴장을 촘촘히 쌓으며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역학과 그 변모를 끈덕지게 보여 주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망연자실의 상태 어딘가에 사태의 진의가 있을 거라고 말해 옵니다. <열두살>은 아이를 잃은 한 여인을 우연히 보게 된 아이들이 무슨 마음에서인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아이를 찾겠다고 제 딴에 힘을 보태는 이상한 동참기입니다. 어른의 시선으로는 완벽히 설명되지 않을 아이들의 애씀과 애끓음이 과장 없이 유유히 흐릅니다. <정말 먼 곳>은 전작을 통해 불화하는 시간 속에서도 제 삶의 속도와 좌표를 찾아가려는 인물에게 마음을 쏟은 감독이 자신의 관심사를 좀 더 극적으로 실험한 경우입니다. <종착역>은 ‘세상의 끝’을 찍기 위해 길을 나선 사진반 소녀들의 로드무비로 그들의 움트는 생기와 호기심이 또 다른 세계의 시작을 알리고 있음으로 우리를 천연히 이끕니다. <휴가>는 단편 <천막>을 비롯해 긴 세월 복직 투쟁을 해온 콜트콜텍 기타 노동자들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영화로 옮겨온 감독이 그간의 작업을 벼리고 집약한 경우입니다. 창작자가 오랜 시간 몰두하고 매료됐던 인물과 현장은 이로써 또 다른 생명력을 얻고 더 너른 품을 만들어냅니다. 
극영화가 영화 서사의 너른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했다면 5편의 다큐멘터리는 강렬한 파고로 우리를 흔들고 감응하게 합니다. 재개발로 사라진 공간, 사람에 관한 다큐멘터리는 익숙할 수 있으나 <봉명주공>은 기교 하나 없이 공간을 둘러싼 사람, 기억, 생명의 기운을 살가운 눈으로 살피고 살뜰히 담으며 봉명주공의 마지막을 기록합니다. <사당동 더하기 33>은 사회학자인 감독이 무려 33년에 걸쳐 한 집안의 4대에 걸친 시간을 담아낸 놀라운 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힘은 긴 시간의 더께가 아니라 지리멸렬한 자신들의 형편을 카메라 앞에 내준 인물들의 강인함과 지금껏 이 관계를 지탱해 온 카메라의 힘에 있을 것입니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기적이라고밖에 설명할 길 없는 감독과 주인공의 만남을 시작으로 두 사람이 나눈 기이한 우정을 통해 쓸쓸한 시대의 초상과 영화의 운명을 엿보게 합니다. <재춘언니>는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휴가>와 함께 두고 봐도 좋겠습니다. 영화는 투쟁의 과정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말하고 노래하게 된 노동하는 인간의 흔적과 고뇌를 허투루 흘려보내지 않으려 부단히 방도를 찾습니다. <학교 가는 길>은 5년이 지나도록 진행조차 되지 못했던 서울시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문제에 접근하면서 장애 학생을 자식으로 둔 어머니들이 서로를 보듬고 응원하며 걸어온 길을 지지하며 묵묵히 그들을 따릅니다. 
143편의 출품작 하나하나가 한국 독립영화의 지평을 넓히고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지표임을 알기에 출품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12편의 최종 선정작을 통해 2020년 한국 독립영화의 현재를 잠정적으로나마 독해하고 치열한 질문과 논의가 이어지길 기대합니다. COVID-19로 경직되고 긴장한 마음이 영화를 통해 잠시나마 누그러지길, 영화가 환기와 전환의 틈이 돼 주길 바라며 모두에게 안부를 전합니다. 곧 서울독립영화제2020에서 뵙겠습니다. 
서울독립영화제2020 본선 장편경쟁 부문 예심위원(가나다순)
남다은(영화평론가)
모은영(영화평론가)
박광수(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 프로그래머)
정지혜(영화평론가)